혁신적인 매트릭스 시스템
그간 ABB는 매트릭스 시스템으로 이름이 높았다. ‘크고도 작은 기업, 글로벌하지만 로컬한 기업, 중앙집권적이면서도 분권적인 체계’로 대표되는 매트릭스 시스템은 ABB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100개국에 이르는 지점, 직원 수 14만 명에 이르는 ABB사는 사업 영역과 지역을 독립적인 차원에서 교차하여 시너지를 냈다. 특히 5천여 개에 이르는 소규모 사업장의 현지화 전략은 고객과 밀착, 고객 니즈에 선도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 ABB가 빠른 시간 내에 세계시장을 제패할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런 매트릭스 시스템은 그동안 세계 굴지의 기업들에 혁신적인 사업구조로 평가되며 벤치마킹 1호로 연구되기도 했다.
세계 1위 사업도 버린다
그러나 최근 ABB 그룹은 그룹의 모태가 된 송배전 사업을 일본 기업 히타치사에 매각하면서, 30년 넘게 전력 분야의 왕좌에 군림하도록 해 준 매트릭스 시스템을 중단했다. 시장점유율 1위 사업과 절대적인 성공을 보장해 준 시스템을 중단한 이유는 극명했다. 전력산업 여건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또,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매트릭스 시스템은 복잡하고 느린 의사결정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세계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화 중이며 산업 또한 빠르게 개편되고 있는데, 기존의 성공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현실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보적인 선도 기술을 위한 투자
그러면서 ABB는 전기, 산업 자동화, 모션, 로봇 등 4대 산업을 중심으로 ‘ABB Ability’를 천명하며, 독보적인 선도 기술을 갖추기 위해 투자를 감행하기로 했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산업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디지털 기술을 적용해 산업 내 운영 및 자산에 대한 생산성, 효율성, 안정성을 높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전기차충전소와 모터 효율강화 기술이다. ABB의 전기차 급속 충전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4분 충전만으로 100km 이상 주행이 가능한 기술을 보유 중이다. 이 부분 세계 점유율도 1위다. 이들이 제작한 충전소는 2018년까지 7,000대 수준이었지만 2019년에는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더욱이 급속하게 진행되는 전기자동차 보급률을 고려해 보면 이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ABB의 결정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모터 효율강화 기술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적으로 산업용 전기 사용량의 절반 이상은 전기 모터를 구동하는 데 쓰인다. 고효율의 모터를 통해 전력을 감축하는 시장은 언제든 열려있다.
진짜 비전에 투자
1990년대 한 그룹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이후 우리는 초거대 기업이 탄생하는 것을 목도했었다. 그런데 진짜 잘하는 것, 진짜 비전이 보이는 곳에 투자하기 위해 1등 사업 부분을 매각하는 ABB를 보며 탄식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정은 이제 물음표가 아니라 느낌표가 되는 모양새다. ABB는 송배전 부분 매각을 통해 얻은 자금을 다른 디지털 산업 분야를 강화하는 데 쓰일 계획이라고 한다. ABB의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이 집중할 영역은 2025년까지 연평균 3.5~4%씩 성장해 전 세계시장 규모가 5,500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를 위해 연간 10억 달러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한다. 잘 할 수 있는 분야, 성공할 수 있는 분야에 선도적으로 투자하자는 철학, 누구에게든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금과옥조(金科玉條)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