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매’로 무장한 ‘마포 김사장

“성공한 덕후요? 제가 성공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웃음)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니 다행이라고 느껴요.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같은 일을 하면 좋겠어요.”
김홍민 대표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추리소설, SF, 판타지 등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인 북스피어는 2005년 설립 후 지금까지 150여 종의 책을 펴냈다. <화차>로 잘 알려진 일본 추리소설의 여왕 미야베 미유키를 비롯해 마쓰모토 세이초, 김탁환, 듀나 등 여러 작가의 작품이 북스피어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이른바 성공한 덕후이자 오랫동안 서울 마포구에서 일한 탓에 ‘마포 김사장’이라는 친근한 별명이 붙은 김홍민 대표는 ‘장르문학 전도사’라고도 불린다. 김홍민 대표와 ‘덕질’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건, 그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활발히 활동하는 ‘덕업일치’를 이뤘기 때문. “어릴 적 <셜록홈즈> 시리즈와 무협지에 심취해 식사도 거르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수십 권의 책을 독파하는 건 다반사였어요. 분량이 길고 다양한 장르의 책을 찾아 읽다 보니 ‘책 읽는 근육’이 발달했죠.”
김홍민 대표는 한때 소설가를 꿈꿨던 적도 있지만 창작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문학을 직접 펴내는 출판사 북스피어를 연 것이다. 그러나 김홍민 대표가 출판사를 차렸던 때만 해도 장르문학에 대한 인지도는 높지 않았다. 북스피어(booksfear)란 이름에 ‘망할지도 모른다’라는 두려움이 담긴 것도 그 때문. 스스로를 ‘야매 출판인’이라고 부를 만큼,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지 어느새 15년. 그동안 장르문학의 위상도 많이 높아졌지만 김홍민 대표의 소회는 담담했다. “출판계 또한 소규모 출판사는 생존이 어려운 상황이에요. 그럼에도 북스피어는 이 정도 자본과 인력으로도 망하지 않고 잘 살아남았다고 생각해요.”

덕후몰이의 원천은 ‘재미’

장르문학이란 용어조차 생소하던 때, 북스피어는 과감한 행보로 주목받았다. 이전까지 다른 출판사에서는 시도하지 않았던 기발하고 재미있는 이벤트가 그 주인공이었다. 출간하는 책만큼이나 ‘북스피어’란 출판사 자체에 열광하는 마니아들이 생겨난 것도 독특한 마케팅 덕분. <이와 손톱>(빌 밸린저 작)의 결말을 봉인해 출간하면서 ‘결말이 궁금하지 않다면 책값을 돌려드린다’라고 했고, 독자와 함께 신간 출간 전 본문의 오자(틀린 글자)를 찾으며 여행하는 ‘낭만독자 열차교정’도 떠났다. 김홍민 대표가 직접 취재하고 쓴 콘텐츠로 가득한 야매 장르문학 소식지 <르 지라시>를 발행하고, 극한 상황에서 책을 읽는 사진을 찾는 ‘익스트림 리딩’ 사진 공모전도 개최했다. 매년 여름에는 장르문학 대독자 팬서비스 ‘장르문학 부흥회’를 연다.
북스피어의 SNS에서는 김홍민 대표가 ‘형제자매님’이라고 부르는 독자들이 수시로 댓글과 아이디어를 보탠다. 단순히 출판인과 독자의 사이를 뛰어넘는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될 수 있었던 데는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재미’가 있었다. 김홍민 대표는 어떤 생각이든 ‘재미있겠다. 일단 한 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을 중시한다.
“출판사가 재미있는 일을 잘하지 못하는 건 매출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어떤 아이디어든 매출과 상관없이 ‘일단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이어왔어요. 저도 사람들이 과연 북스피어의 활동을 좋아하고 지원해줄까 걱정은 늘 하고 있어요. 그러나 실패한다고 해서 좌절하진 않아요.”

재미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취향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자신의 재미를 찾아가길

김홍민 대표는 저서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에서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하나의 ‘놀이’로 인식하고 있다’라고 썼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책을 읽는 일이 재미없기 때문이며, 독자로 하여금 북스피어의 책을 사면 이곳만의 독특한 향취가 있어서 좋다는 기분과 놀이에 동참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하고 싶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홍민 대표에게 재미란 단순히 웃고 즐기며 순식간에 사라지는 유흥이기보다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었고, 길고 긴 삶을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본인의 삶을 견디기 위해 해방구를 만들어놓을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책에서 해방구를 찾으려면 예전처럼 ‘훌륭한 내용이 담겨 있으니 봐주세요’로는 되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스마트폰이 아닌 책에서 재미를 찾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김홍민 대표에 따르면 재미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취향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누구나 코메디언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무조건 추종하기보다 자신만의 취향을 찾는 것이야말로 재미없는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요즘에는 전문가의 ‘큐레이션’에 의지하느라 자신의 취향을 찾는 것도 게을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을 잃어가는 거죠. 이 기회에 본인의 취향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삶에서 재미를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재미를 추구하는 거죠.” 김홍민 대표는 개인적으로 꼭 이루고픈 로망이 하나 있다.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한 7대 불가사의를 직접 보고 글로 옮기는 것.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불가사의로 남은 광경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했던 경험을 합친 것보다 경이롭지 않을까요. 아직 불가사의 중 한 개도 못 봤지만 언젠가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무조건 추종하기보다
자신만의 취향을 찾는 것이야말로 재미없는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삶의 무게를 이겨내는 힘

책 읽기를 좋아했던 소년은 어른이 되어 우리나라에 장르문학의 매력을 전파하는 전도사이자 기존의 출판마케팅 관행을 뒤엎은 재미있는 혁신가가 됐다. 지난 15년간, 재미있는 일을 찾아 달려온 김홍민 대표에게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가슴 설레게 하는 일이 있다.
“작가가 보낸 글을 처음 받아봤을 때 가슴이 뛰어요.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글에 대해 제 의견을 달아 작가에게 보내고 또 작가가제 의견을 반영해 원고를 수정해오면, 제가 작가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아 신납니다.”
김홍민 대표는 북스피어 창립 10주년 인터뷰에서 ‘지난 10년간 한번도 계획을 세운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15주년을 맞은 올해는 어떨까. 그의 답은 여전히 같았다. “저는 계획을 세우는 데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계획대로 된 일도 한 번도 없었고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책 판매를 염두에 두지 않고 사람들과 재미있는 일들을 꾸준히 하고 싶어요. 은퇴하기 전까지 재미있는 이벤트를 벌이는 게 유일한 계획이에요.(웃음)”
김홍민 대표는 LS산전 임직원이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취향을 찾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삶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만큼 좋아하는 일을 찾아 재미를 느끼며 쉼을 얻고, 다시 정진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의 말대로 이번 여름휴가 때는 자신만의 재미를 찾아 진정한 리프레시를 실천하는 건 어떨까.


북스피어 김홍민 대표도 푹 빠진 재미!
시원하고 환상적인 장르소설 도서관


| 액스 |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저 / 최필원 역 / 오픈하우스 펴냄

무엇을 걸쳐도 슈퍼마켓의 세일 상품을 입은 것 처럼 평범하고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중년남성. 23년 동안 일하던 회사에서 난데없이 해고를 당하자 삶은 순식간에 피폐해졌다. 그는 증오와 복수심에 사로잡히고, 재취업을 위해 자신의 경쟁자들을 죽이기 시작하는데…. 복수 시리즈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이 가장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소설. 하지만 중년남성이 해고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박찬욱 감독의 영화화 계획은 한 발자국도 못 나간 채 엎어진게 아닐까. 안타까운 일이다.


| 삼귀 | 미야베 미유키 저 / 김소연 역 / 북스피어 펴냄

요리사 지망생인 후사고로에게 아귀가 씌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음식 공부를 하는 동안 그가 만든 음식을 잔뜩 먹은 아귀는 후사고로가 음식점을 열자 장사가 번창하도록 돕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음식점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던 아귀가 살이 쪄서 집이 그 체중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 후사고로는 급히 장사를 접고 아귀에게 다이어트를 종용하는데…. 과연 아귀의 다이어트는 성공할까.
절품 도시락 가게 주인장에게 달라붙은 귀여운 대식가 요괴의 살 빼기 대작전! 무더위를 잊게 만드는 재미에 푹 빠져보자.


| 괴담의 테이프 | 마쓰다 신조 저 / 현정수 역 / 북로드 펴냄

실화 같은 괴담 6편이 등장하는 <괴담의 테이프>를 읽는 동안 철썩 들러붙는 그것은 공포! 호러와 미스터리를 절묘하게 융합한 특유의 작품세계로 한일 양국의 절대 마니아층을 거느린 미쓰다 신조. 굳이 비교하자면 스티븐 킹의 소설은 ‘정말 무섭다, 하지만 전부 거짓말이겠지’ 하는 느낌인데 반해 그의 소설은 ‘무섭다, 어쩌면 정말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몰라’ 하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마쓰다 신조가 시작부터 “자살하기 직전에 가족이나 친구, 세상을 향해 녹음기에 메시지를 녹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라고 써놓으면 역시, 정말인 것 같아서 더 무섭다.

| 토니와 수잔 | 오스틴 라이트 저 / 박산호 역 / 오픈하우스 펴냄

소설가 지망생인 전 남편 토니는 어느 날 헤어진 아내 수잔에게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제목의 소설을 보낸다. 소설 속 수잔은 소설 속 소설을 읽으며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낀다. 소설 속 소설을 읽는 수잔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소설을 읽는 독자도 어쩔 수 없이 불안해진다. 문제는 불안하지만 소설의 끝을 보지 못하면 더 불안해질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 그래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도 마지막까지 후다닥 읽기를 마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소설의 굉장한 힘이다.